차미리사: '동병상련'에서 '자립'으로의 여정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철학과 실천: '동병상련'에서 '자립'으로의 여정
Executive Summary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한 여성의 삶은 어떻게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희망을 심었을까요?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자신의 깊은 '동병상련적 태도'를 바탕으로 한국 여성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해외 유학을 통해 얻은 비전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그는 국권 회복 운동에서 여성 교육으로 활동의 초점을 전환하며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와 같은 가슴 저미는 호소로 발현되었고, 이는 절망에 빠진 여성들에게 치유와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시작하여 근화학원, 근화여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로 발전시킨 그의 여정은, 비정규 교육기관을 정규 학교로 성장시킨 유일무이한 여성 지식인의 성공 사례로 빛납니다.
이러한 발전은 그의 굳건한 의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그리고 일제 문화통치 정책과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대한 지혜로운 대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I. 서론
A. 차미리사: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조명, 그녀는 어떻게 역경을 넘어섰나?
차미리사는 1879년에 태어나 1955년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여성 교육계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차미리사의 가장 독보적인 업적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한국인 여성의 힘으로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이를 성장시켰다는 점입니다.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단순히 학교를 세우는 것을 넘어, 시대 변화에 따른 그의 현실 인식, 여성 교육관, 그리고 교육 사업의 중점 변화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B. 보고서의 배경, 목적 및 구성
기존 연구들은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조명하고 민족 교육 운동 및 여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부각해왔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차미리사의 '동병상련적 태도'와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와 같은 구체적인 인용구 및 감성적인 일화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개인적 경험, 변화하는 교육 철학, 그리고 식민지 현실 속에서 기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적 접근과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본 보고서는 차미리사의 개인적 동기, 대중적 호소력, 교육 기관의 발전 과정, 교육 철학의 심화, 그리고 그의 지속적인 유산에 초점을 맞춰 총 다섯 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됩니다. 이를 통해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활동이 지닌 다층적인 의미와 복합적인 성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II. 차미리사의 '동병상련의 자세'와 교육 철학의 뿌리: 어떻게 그녀의 삶은 여성 교육의 씨앗이 되었나?
A. 개인적 경험과 여성 현실 인식: 고난 속에서 피어난 공감의 힘
1. 유년기 및 청춘 과부로서의 삶: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발견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 특히 '동병상련적 태도'는 그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상동예배당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 미국 유학과 선진 여성 사회 견문: 치유와 변화를 위한 비전의 확장
차미리사는 1901년 중국 유학을 떠났고, 1905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0년까지 학비를 벌며 대동보국회, 대동교육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의 교육 사업 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황금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미주에 있을 때 가장 느낀 바는 그 나라 여성들의 사회사업열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미국 여성들의 사회사업의 철저함과 광대한 범위에 놀라움을 표했습니다.
또한 그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대동보국회 기관지인 『대동공보』 발행에 관여하는 등 미주 교포 사회에서 활발한 조직 및 리더십 경험을 쌓았습니다.
B. 불행하고 소외된 여성에 대한 공감: 그녀의 아픈 가슴은 어떻게 희망으로 피어났나?
1. 사회적 문제로서의 여성의 고통: 외면할 수 없었던 아픔의 현실
차미리사는 귀국 후 배화여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여자도 남과 같이 행복되게 살려면 무엇보다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이러한 "부부의 불화와 이혼의 원인이 여자의 부족한 지식"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2. 교육을 통한 치유와 변화의 비전: 절망의 눈물을 닦아준 그녀의 약속
차미리사는 여성들이 겪는 압제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 여성 교육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 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이러한 호소는 단순히 문맹 퇴치를 넘어, 이혼한 남편을 돌아오게 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포함하며 여성들의 가장 절실한 개인적 고통에 직접적으로 다가갔습니다.
1922년에 들어서면서 차미리사의 논리는 더욱 발전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해방이니 동등이니 자유니 하는 언사를 쓸데없이 부르짖지 않습니다. 오직 여자를 교육하여 각자의 인격을 완성하여 자기 손으로 해방과 자유를 차지하여 피동적으로 실력도 없이 남자가 준다는 해방과 자유를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갯감,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오래이다"라는 또 다른 강연 문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III.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감성적 호소와 민족 교육의 확산, 그녀의 한마디가 어떻게 수많은 여성들을 치유했나?
A. 전국 순회 강연의 배경과 목적: 절망 속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다
1. 조선여자교육회 창설과 계몽 운동: 어둠을 밝히는 교육의 불씨
차미리사는 1920년 3월, 3.1 독립운동 이후 고조된 '향학열'을 목격하고 여성 동지들과 함께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했습니다.
이후 1921년, 조선여자교육회는 차미리사의 주도로 전국 곳곳에 여자 강연단을 이끌고 다니며 계몽과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2. 일제 문화통치 하에서의 활동 양상: 역경 속에서 피어난 지혜로운 전략
차미리사의 교육 사업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의 활동은 설립 초기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총독부 통치를 뒷받침하는 관제 언론의 성격이 짙었던 『매일신보』에까지 자세히 보도될 정도로 이례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1920년 김활란이 이끌었던 7인 전도대가 전국 순회 강연을 목표로 지방을 순회했으나, 집회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강연 도중 중지당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일제의 압력으로 일정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B. 인용구의 감성적 힘과 대중적 파급력: 그녀의 한마디가 어떻게 수많은 여성들을 치유했나?
1. 고통받는 여성들을 향한 직접적인 호소: 절박한 외침, 깊은 공감
차미리사의 강연은 시작부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감성적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그가 강연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 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이러한 호소는 단순히 문맹 퇴치나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여성들이 직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 즉 이혼, 과부, 남편의 구박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2. 교육을 통한 희망과 자립의 메시지: 치유를 넘어선 주체적 삶으로
차미리사의 메시지는 초기에는 가정생활 개선과 부부 화목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점차 여성의 자립과 주체성 확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강연에서 "우리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갯감,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오래이다"라고 역설하며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각을 촉구했습니다.
C. 언론과 사회의 반응: 시대는 왜 그녀의 외침에 응답했나?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과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 순회 강연은 당대 언론과 사회로부터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은 조선여자교육회 회원들을 "조선여성계의 혁명군"이라고 격려하며, 이들이 학식과 교양을 보급하여 "현모양처의 자격을 구비하고 참정권을 얻는 데까지 운동하여 서양의 여성계와 어깨를 견주게 되기"를 전망하는 등 큰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부인야학강습소에 대해서는 "가정생활을 개선하고 조선사회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여성의 해방과 완전한 행복을 도모하는 새싹"이라고 표현하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여성 교육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미리사의 강연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교육 중간에 공연을 배치하는 등 대중 친화적인 요소를 활용했습니다.
IV. 여성교육사업의 발전과 현실적 타협: 변화의 파고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았나?
A. 부인야학강습소에서 근화학원까지: 작은 야학에서 시작된 기적, 어떻게 성장했나?
1. 설립 배경 및 초기 교육 목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첫걸음
차미리사가 1920년 설립한 부인야학강습소는 '여성 교육을 통해 구식 가정부인의 가정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차미리사는 이 사업을 "순전히 한국인의 힘을 모아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2. 주야학 병행과 교육 대상의 확장: 희망의 문을 더 넓게 열다
부인야학강습소는 설립 2~3년 만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학생 수가 급증하여 1년 반 만에 청진동 가옥이 좁아질 정도였으며, 이에 따라 학교, 기숙사, 회관을 확장 건축하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해야 했습니다.
1923년에는 강습소의 이름을 '근화학원'으로 짓고 주야학을 병설하여 운영했습니다.
B. 근화여학교의 교육 실험과 전환 모색: 변화의 파고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길을 찾았나?
1. 인문계 중등교육 및 전문교육 시도: 더 높은 꿈을 향한 도전
1925년 9월, 근화학원은 보통과와 고등과(중등교육과정)를 갖춘 각종학교인 근화여학교로 총독부 인가를 받았습니다.
차미리사는 또한 전문 교육 과정의 신설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24년 3월, 그는 중등 교육을 마친 후 진학하는 전문 교육 과정으로 음악과를 신설했습니다.
다음은 근화여학교의 인문계 중등교육과정과 영어반 및 음악반의 추이를 보여주는 표입니다.
<표1 근화여학교 인문계 중등교육과정의 추이>
<표2 영어반과 음악반의 추이>
2. 시대적 요구와 교육 방향의 변화: 미래를 읽는 지혜로운 결단
차미리사의 영어 및 음악 전문 교육 시도는 비록 선구적이었으나, 학생 모집의 어려움과 총독부 인가 문제, 그리고 취업이나 가사에 대한 실용성 부족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차미리사는 1929년경부터 근화여학교의 교육 대상과 성격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1931년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 '교육 즉 생활, 생활 즉 근로'라는 근로주의 교육을 표방하며 실업 교육을 장려하고, 중등학교 신설 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실업 학교 외에는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차미리사의 이러한 전환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차미리사는 "글자나 배워서 무엇 하느냐? 글자가 밥을 주고 책이 집을 주는 것은 아니다. 생활 안정을 위한 실제적 교육이 아니면 조선을 위한 참된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실제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C.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정착과 덕성여자실업학교로의 개명: 역경을 넘어선 결실, 덕성으로 피어나다
1. 정규 중등직업교육기관으로의 승격: 성공을 향한 굳건한 발걸음
차미리사의 이러한 현실 인식과 여성 교육론의 변화에 따라, 그는 근화여학교를 여자직업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사업이 시대의 변화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수많은 교육 실험 과정을 거친 결과,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주학의 중등 실업 교육 기관으로 정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언론은 근화여자실업학교에 대해 '직업부인 양성을 위주로 실제교육을 실시하는 시대에 적합'하고 '조선여성들의 새로운 요구에 따라 보통 교육보다도 더 필요한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표 3: 실업교육, 직업교육의 진화 : 상업과, 가사과
위의 인용문에서는 근화여학교의 입학생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 차미리사가 학교의 성격, 형식, 내용에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1932년의 경우를 보더라도 보통과 졸업생 40명, 고등과 졸업생 29명은 적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인원수의 감소로 인해 근화여학교의 보통과·고등과를 폐지하고 실업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언론의 보도는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이는 언론이 학교측과 차미리사의 입장을 대변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전환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종 학교인 근화여학교로 있으면 비록 학력인정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학기 시작마다 보통과 50명, 고등과 50명, 음악과 30~50명, 합 150명의 입학생 모집(실제 모집되는 인원은 100명 정도)으로 많은 인원을 수용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단기 6개월 과정의 재봉이나 사진과와 같은 실업교육까지 합하면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더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여자실업학교가 된 후에는 상업과 중등교육 3년 과정으로 180명만을 수용해야 하기에, 매년 60명의 입학생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곧 각종학교인 근화여학교가 근화여자실업학교라는 정규학교가 되면서 학생 총수(입학생·재학생)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인가는 고등과, 보통과, 음악과의 폐지를 의미했습니다. 이전에 유치원, 초등교육부터 중등, 전문(고등)교육까지 함께 있던 학교의 교육체계가 중등실업교육으로 전환되어 여자중등실업학교로 단일화된 것입니다. 이로써 나이 제한이 없는 여성보통교육기관, 모든 단계의 교육과정 구비라는 근화여학교의 특성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여성인구의 90%가 문맹이었던 한국사회현실에서 학령기를 놓친 기혼부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던 당초의 교육적 역할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근화여자실업학교가 되면서 이전(근화여학교)에 비해 학력의 공인, 중등교육에의 집중, 실업교육의 강화, 정규학교로의 승격이라는 면에서 질적 향상을 이루었지만, 교육대상의 규모와 범위는 양적으로 훨씬 줄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전환은 구식 가정부인들에게 글을 읽게 하고 상식을 깨우쳐 가정생활을 개선함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부인야학강습소 시절의 부녀교육론이 여아의 중등직업교육, 직업여성 양성에 중점을 두는 여아교육론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여성교육의 중점이 부인에서 여아로, 비정규교육에서 정규교육으로, 보통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다양한 교육시도에서 실업교육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통한 여권향상이라는 그의 여성교육관, 실업교육관은 유지되었습니다. 생활개선을 위한 여성교육을 여전히 강조하되, 부인의 보통교육보다는 여아의 직업교육, 중등교육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신문지상을 통해 여성보통교육이 어느 정도 보급되었다는 판단 하에 정규중등교육과정인 여자실업학교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차미리사는 이미 여성교육에 있어 중등실업교육과정과 함께 전문교육과정, 인문계 중등교육과정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또한 1930년대에도 여전히 대다수 한국여성이 문맹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에 사회적으로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을 비롯하여 농촌계몽운동, 한글보급운동,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근화여학교의 성격전환에 대한 이상과 같은 차미리사의 설명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근화여자실업학교 설립은 정규학교 승격을 통한 여성교육의 질적 향상, 여아의 중등직업교육, 가사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했던 차미리사의 여성교육관, 실업학교 위주로 신설과 정규학교 인가를 허용했던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경제난, 취업난을 고려한 차미리사의 현실적 대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차미리사는 부인야학강습소 설립 14년 만에 야학강습소를 정규중등학교로 발전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는 비정규교육기관인 여자야학에서 성장한 여성교육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여 재단법인을 갖춘 정규 중등직업교육기관이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근화여학교는 각종학교(잡종학교)로써 정규교육기간의 반에 해당되는 기간에 속성교육을 실시하는 비정규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는 근화여학교를 정규학교로 만들어 경영해 보고자했던 그의 숙원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규학교에서의 상업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여성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의 위상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1936년 3월 근화여자실업학교 제1회 졸업생 배출에 맞추어 자신의 성과 이름을 김미리사에서 원래의 차미리사로 바꿀 정도로, 근화여자실업학교는 차미리사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차미리사는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정규학교 인가에 안주하지 않고 학교의 확장을 목표로 청사진을 제시하며 학교발전을 모색했습니다.
2. 여자실업교육의 지향: 사회진출과 가정주부, 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다
1934년 봄까지만 해도 차미리사는 졸업식 축사를 통해 여성교육을 통한 '사회진출보다 가정'에 중점을 두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세상의 이목을 놀래킬 정치가, 학자, 예술가, 상인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겠지요...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니... 실현하지 못할 공중누각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공연히 들뜬 마음으로 사회인 운운을 꿈꾸는 것은 재미없는 일입니다. 여자란 가정으로 들어가 다부지게 일하고 찰찰하게 굴어 그 곳에서 참 기쁨을 찾아야지, 허황된 생각에 들떠 건들거려서는 자기 한 몸이 해를 입을 뿐 아니라 그 해독이 사회 전체에 미칠까 합니다.
이상에서 차미리사는 무엇보다 섣부른 사회진출을 경계하며 가정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실업과를 이수한 졸업생이 아직 배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의 보통과와 고등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훈시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년 뒤인 1936년 3월 근화여자실업학교 제1회 졸업생의 배출과 함께,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은 여성의 사회진출 곧 직업여성이 되는데 더욱 중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하여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남의 종속물, 노예생활, 기생자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결혼은 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며 자아를 찾은 후에야 참된 아내, 진실한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여자도 인간인 이상 자기도 이 사회의 한 구성분자라는 것을 의식하고,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나 생활이 군색해서 부득이 직업을 가지는 이가 되지 말고, '내 생활은 내 손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도 알아야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교육을 받고 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자기를 완전히 찾을 수 있다는 당부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남자를 이기라'고 하며 여권의식을 심어주었고, 이를 위해 사회에 나가 취업하고 경제력,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여성교육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은 여권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차미리사와 근화여자실업학교가 여성의 상업교육을 표방하고 직업교육에 집중한 결과, 은행, 회사, 금융조합 등 여러 기관에 취직하는 졸업생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졸업생들의 진로는 취업과 가정이 반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는 근화여자실업학교 여성 교육의 장점으로 직업여성뿐 아니라 가정주부로서의 자질이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모자라는 우리에게 큰 지식과 이상도 필요하겠지만 진실하고 일 잘하는 가정부인, 살림 살리는 솜씨있는 주부의 손에 바로 잡힐 것입니다. 이 학교는 그저 솜씨있는 일꾼을 길러내는 것이 교풍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건실한 살림살이를 배운 아가씨들은 각각 자기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 사회 전반에 흩어집니다.
이와 같은 언론의 논조는 아마도 학교 당국 곧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전환하고자 1932년 4월 총독부에 재단법인 인가 신청을 제출할 때부터 실업과에 상과와 가정과를 함께 두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1933년에는 가사과, 상업과에 각 50명씩 입학생 선발을 계획하는 등 근화여자실업학교에 상과만이 아니라 가사과도 함께 두고자 했습니다. 차미리사가 근화여학교의 정규학교 승격을 위해 학교의 체제와 내용을 정비하면서, 여학교의 가사교육 강화를 원하는 일반사회의 요구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여권향상이라는 여성계의 당면과제를 함께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차미리사의 가사과 설립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과만을 인정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를 정규상업학교로 인가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는 결국 차미리사의 여성교육관과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의 접합지점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1938년, 근화여자실업학교는 '근화'라는 민족 의식이 깃든 이름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 당국에 타협하여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했습니다.
그러나 1년 후인 1940년, 졸업생들의 취직률은 급격히 하락했고 가정으로 들어가는 이가 취직하는 이보다 2배나 많아졌습니다.
1940년 차미리사는 교장에서 물러났습니다.
이 시기 차미리사의 여자교육의 중점은 정규 실업교육에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자립과 경제활동, 사회활동과 여권향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여자실업교육의 내용은 실제교육 곧 상업·판매 등 직업교육과 기예 양재 등 가사 부업 관련 교육이었습니다. 그가 추진했던 여자교육의 목표는 근화여자실업학교의 확대와 발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지배 하에서 여자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고 확장하면서 일제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었다는 현실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V. 결론
A. 차미리사 교육 활동의 다층적 의의: 그녀의 교육, 시대를 넘어선 울림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활동은 개인적인 '동병상련적 태도'에서 시작하여, 시대적 요구와 현실적 제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다층적인 의의를 지닙니다. 그는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출발하여 근화학원, 근화여학교를 거쳐 정규 중등 실업 교육 기관인 근화여자실업학교(덕성여자실업학교)로 발전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1924년에 개설한 음악과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보다 앞선 전문 교육 과정으로, 그의 선구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B. 현실주의적 접근과 한계: 현실의 벽 앞에서,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넓은 의미에서 민족 운동 및 여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도, 그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실리적인 타협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또한, 민족 의식이 담긴 '근화'라는 교명을 일제가 못마땅하게 여기자 1938년 '덕성'으로 개명하고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에는 한계도 존재했습니다.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 여성의 법적 지위 문제, 가사 노동과 육아, 가정 경제와 가정 교육 등 사회적 재생산을 담당하는 주부의 역할에 대한 가치 평가 등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으며, 당대 활발했던 농촌 계몽 운동이나 민족 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습니다.
표 4: 차미리사 교육기관의 진화와 초점
| 시기/연도 | 기관명 | 유형/상태 | 주요 교육 초점/특징 | |
| 1920년 | 부인야학강습소 | 야학 | 기본 문해 교육, 가정생활 개선 | |
| 1923년 | 근화학원 | 주야학 병설 | 여고보 입시 준비반 신설, 교육 대상 확대 | |
| 1925년 | 근화여학교 | 각종학교 (주학 위주) | 보통과, 고등과 설치, 인문계 중등교육 강화 시도, 영어/음악 전문 과정 시도 | |
| 1935년 | 근화여자실업학교 | 정규 을종 상업학교 | 중등 직업 교육 (상업 교육 중심),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강조 | |
| 1938년 | 덕성여자실업학교 | 정규 을종 상업학교 | 일제의 압력으로 교명 변경, 실업 교육 지속 |
C. 지속적인 유산: 덕성여자대학교, 오늘날, 그녀의 꿈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가?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그의 생애를 넘어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세운 근화학원은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의 뿌리가 되었으며
덕성여자대학교는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참고문헌:
저자: 김성은
제목: 1920~30년대 차미리사의 현실인식과 여자교육활동: 부인야학강습소에서 덕성여자실업학교까지
출처: 『중앙사론』 36집
발행년도: 2012년
페이지: 99-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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