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동병상련'에서 '자립'으로의 여정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철학과 실천: '동병상련'에서 '자립'으로의 여정

Executive Summary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한 여성의 삶은 어떻게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희망을 심었을까요?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자신의 깊은 '동병상련적 태도'를 바탕으로 한국 여성 교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해외 유학을 통해 얻은 비전과 조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으로, 그는 국권 회복 운동에서 여성 교육으로 활동의 초점을 전환하며 독자적인 길을 개척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와 같은 가슴 저미는 호소로 발현되었고, 이는 절망에 빠진 여성들에게 치유와 변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시작하여 근화학원, 근화여학교를 거쳐 최종적으로 덕성여자실업학교(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로 발전시킨 그의 여정은, 비정규 교육기관을 정규 학교로 성장시킨 유일무이한 여성 지식인의 성공 사례로 빛납니다. 

이러한 발전은 그의 굳건한 의지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그리고 일제 문화통치 정책과 사회의 현실적 요구에 대한 지혜로운 대응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통한 진정한 해방과 사회적 지위 향상을 추구했으며, 이 숭고한 정신은 덕성여자대학교의 창학 이념으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 글은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과 실천이 어떻게 개인의 고난에서 출발하여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며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현실적 타협과 미래 지향적 비전이 어떻게 수많은 여성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는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I. 서론

A. 차미리사: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조명, 그녀는 어떻게 역경을 넘어섰나?

차미리사는 1879년에 태어나 1955년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여성 교육계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중국과 미국에서 유학한 '신여성'으로, 한말 미국에서 국권 회복 운동에 참여했으나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한국 여성 교육에 헌신하는 교육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한때 남편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로 불리기도 했으나, 1936년에 본명인 차미리사를 회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는 사실입니다.

차미리사의 가장 독보적인 업적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한국인 여성의 힘으로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이를 성장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는 조선여자교육회의 동지들과 함께 부인야학강습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주간 교육을 실시하는 각종학교인 근화여학교를 거쳐, 재단법인을 갖춘 정규 상업학교인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발전시켰습니다. 이 학교는 1938년부터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교사에 불과했던 한 여성이 일제 식민지 시기 총독부 인가를 받은 정규 여자 중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운영한 사례는 차미리사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더욱 빛납니다.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단순히 학교를 세우는 것을 넘어, 시대 변화에 따른 그의 현실 인식, 여성 교육관, 그리고 교육 사업의 중점 변화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현실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그가 표방한 여성교육론과 추진한 교육방향에도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일제강점기 외국 유학 출신 여성 지식인의 귀국 후 동향과 활동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B. 보고서의 배경, 목적 및 구성

기존 연구들은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조명하고 민족 교육 운동 및 여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부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그의 여성 교육 논의와 사업이 정세 변화, 사회의 요구, 현실 인식에 따라 변모하는 과정에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그가 영어와 음악을 중심으로 여자 전문(고등) 교육 과정을 설립하고자 했음과 인문계 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을 고려했음을 조명하지 못했으며, 여성 대다수가 문맹인 상황에서도 미래 교육 수요 변화를 예측하여 보통 교육에서 중등 교육으로 사업의 중점을 옮기기로 결단했음에 대한 분석이 부족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 차미리사의 '동병상련적 태도'와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와 같은 구체적인 인용구 및 감성적인 일화들을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개인적 경험, 변화하는 교육 철학, 그리고 식민지 현실 속에서 기관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적 접근과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특히 그의 교육 사업이 부인야학에서 시작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인가받기까지 다양하게 시도되고 변화하는 과정, 즉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정규 중등 상업 교육 기관으로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명확하게 조명할 것입니다. 또한 그의 교육 활동이 당대 사회적 요구와 기대에 어떻게 부응했는지 언론의 반응을 통해 살펴봅니다.

본 보고서는 차미리사의 개인적 동기, 대중적 호소력, 교육 기관의 발전 과정, 교육 철학의 심화, 그리고 그의 지속적인 유산에 초점을 맞춰 총 다섯 개의 주요 섹션으로 구성됩니다. 이를 통해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활동이 지닌 다층적인 의미와 복합적인 성격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II. 차미리사의 '동병상련의 자세'와 교육 철학의 뿌리: 어떻게 그녀의 삶은 여성 교육의 씨앗이 되었나?

A. 개인적 경험과 여성 현실 인식: 고난 속에서 피어난 공감의 힘

1. 유년기 및 청춘 과부로서의 삶: 절망을 넘어선 희망의 발견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 특히 '동병상련적 태도'는 그의 개인적인 삶의 경험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반폐인(半廢人)"으로 전락하여 "가장 비참하게" 고단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현실을 의미했습니다. 차미리사 역시 이러한 절망에 빠져 살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상동예배당에 다니면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 것이 그의 삶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그에게 희망을 주고 세상을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불행한 여성들을 돕는 데 헌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고통의 경험과 이를 극복한 과정은 그의 교육 활동에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고통과 거기서 벗어난 경험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화가 아니라, 그가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겪는 절망과 소외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동병상련적 태도'를 형성하는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그는 여성 교육이라는 사명에 더욱 강력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차미리사가 청각장애라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그의 강인한 의지와 타인의 고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2. 미국 유학과 선진 여성 사회 견문: 치유와 변화를 위한 비전의 확장

차미리사는 1901년 중국 유학을 떠났고, 1905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1910년까지 학비를 벌며 대동보국회, 대동교육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910년 국권 상실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그는 국권 회복 운동을 중단하고 '우리나라의 여자 사회를 위해 교편을 들고 광명한 사회로 인도'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는 망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독립운동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여성 교육 사업에 주목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의 경험은 그의 교육 사업 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황금의 나라, 자유의 나라 미주에 있을 때 가장 느낀 바는 그 나라 여성들의 사회사업열입니다"라고 언급하며, 미국 여성들의 사회사업의 철저함과 광대한 범위에 놀라움을 표했습니다. 동시에 조선 여성들도 '노력과 지성'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러한 견문은 그의 개인적인 공감을 넘어, 여성이 사회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공했습니다. 즉, 단순히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선진 사회에서 목격한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 모델을 통해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한 체계적인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는 1908년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대동보국회 기관지인 『대동공보』 발행에 관여하는 등 미주 교포 사회에서 활발한 조직 및 리더십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1920년 귀국 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여자시론』을 인수·발간하는 데 필요한 저력으로 작용했습니다.

B. 불행하고 소외된 여성에 대한 공감: 그녀의 아픈 가슴은 어떻게 희망으로 피어났나?

1. 사회적 문제로서의 여성의 고통: 외면할 수 없었던 아픔의 현실

차미리사는 귀국 후 배화여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여자도 남과 같이 행복되게 살려면 무엇보다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1920년대에는 '무식하다'는 이유로 남편이 부인을 구박하거나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여자교육회에는 "소박덕이" (버림받은 여성) 300여 명이 울며 호소할 정도로 기혼 남성의 이혼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이러한 "부부의 불화와 이혼의 원인이 여자의 부족한 지식"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할 남녀 관계의 한쪽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바로잡는 데 '여자 교육의 의의'와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자 교육은 '원만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성의 개인적인 고통, 즉 이혼, 과부, 남편의 구박과 같은 문제들을 단순히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하지 않고, 교육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사회적 문제'로 재정의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재정의는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설득하고, 이를 개인적인 자선 행위가 아닌 사회 전체의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과업으로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2. 교육을 통한 치유와 변화의 비전: 절망의 눈물을 닦아준 그녀의 약속

차미리사는 여성들이 겪는 압제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이 여성 교육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전국 순회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감성적이고 직접적인 호소로 강연의 첫머리를 열곤 했습니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 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이러한 호소는 단순히 문맹 퇴치를 넘어, 이혼한 남편을 돌아오게 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포함하며 여성들의 가장 절실한 개인적 고통에 직접적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교육이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1922년에 들어서면서 차미리사의 논리는 더욱 발전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해방이니 동등이니 자유니 하는 언사를 쓸데없이 부르짖지 않습니다. 오직 여자를 교육하여 각자의 인격을 완성하여 자기 손으로 해방과 자유를 차지하여 피동적으로 실력도 없이 남자가 준다는 해방과 자유를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권리 향상과 남녀 동등이 여성 교육에서부터 시작되며, 여성 스스로가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존엄성'을 자각하고 교육을 통해 '실력'을 길러 '해방과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능동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갯감,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오래이다"라는 또 다른 강연 문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차미리사는 여성들을 즉각적인 개인적 고통의 해결이라는 감성적인 문턱을 넘어, 교육을 통해 본질적인 인간의 존엄성과 자립을 실현하는 단계로 이끌고자 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해방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내면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 쟁취해야 할 과제임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III.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감성적 호소와 민족 교육의 확산, 그녀의 한마디가 어떻게 수많은 여성들을 치유했나?

A. 전국 순회 강연의 배경과 목적: 절망 속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다

1. 조선여자교육회 창설과 계몽 운동: 어둠을 밝히는 교육의 불씨

차미리사는 1920년 3월, 3.1 독립운동 이후 고조된 '향학열'을 목격하고 여성 동지들과 함께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단체의 주요 사업으로 부인야학강습소를 개설하고, 잡지 『여자시론』을 인수·발간하며 여성 계몽 운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후 1921년, 조선여자교육회는 차미리사의 주도로 전국 곳곳에 여자 강연단을 이끌고 다니며 계몽과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는 전국적 규모로 진행된 최초의 여자 강연단 활동이었습니다. 이 강연단은 국내 70여 개의 도시를 순회하며 여성들을 찾아가 교육하는 대규모 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전국 순회 강연은 단순한 교육 활동을 넘어, 3.1 운동 이후 분출된 대중의 교육에 대한 열망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화하려는 전략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운동의 확산에 성공했습니다.

2. 일제 문화통치 하에서의 활동 양상: 역경 속에서 피어난 지혜로운 전략

차미리사의 교육 사업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뀌면서, 순회 강연과 사립 강습소 설립이 상대적으로 용이해진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의 활동은 설립 초기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뿐만 아니라 총독부 통치를 뒷받침하는 관제 언론의 성격이 짙었던 『매일신보』에까지 자세히 보도될 정도로 이례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차미리사의 교육 사업을 1920년대 문화 통치 정책에 부합하는 온건한 교육 운동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했음을 시사합니다. 1921년 조선여자교육회의 순회 강연 시 각 지방 경찰서가 협조적으로 반응했던 사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잘 드러납니다. 강연단은 한양가 금지나 망향가를 다른 노래로 바꾸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 강연 자체를 제지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심지어 일본인 경찰서장의 전송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는 1920년 김활란이 이끌었던 7인 전도대가 전국 순회 강연을 목표로 지방을 순회했으나, 집회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강연 도중 중지당하는 경우가 많아 결국 일제의 압력으로 일정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러한 비교는 차미리사의 조선여자교육회가 일제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상당한 우대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차미리사는 이러한 '문화통치'의 틈새를 활용하여 민족주의적 이상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교육 기관의 생존과 성장을 도모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는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내부 역량 강화를 통해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B. 인용구의 감성적 힘과 대중적 파급력: 그녀의 한마디가 어떻게 수많은 여성들을 치유했나?

1. 고통받는 여성들을 향한 직접적인 호소: 절박한 외침, 깊은 공감

차미리사의 강연은 시작부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력한 감성적 호소력을 지녔습니다. 그가 강연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 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가 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라는 구절은 당시 여성들이 겪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고통을 명확히 명시하며 깊은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호소는 단순히 문맹 퇴치나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여성들이 직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 즉 이혼, 과부, 남편의 구박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특히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라는 파격적인 약속은 교육이 개인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며,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차미리사는 여성들이 받는 압제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여성 교육에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교육을 단순히 학문적 성취가 아닌 삶의 구원과 직결되는 행위로 인식시켰습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시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대다수 여성들에게 교육의 문턱을 낮추고 참여를 유도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2. 교육을 통한 희망과 자립의 메시지: 치유를 넘어선 주체적 삶으로

차미리사의 메시지는 초기에는 가정생활 개선과 부부 화목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점차 여성의 자립과 주체성 확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는 1922년부터 "우리는 해방이니 동등이니 자유니 하는 언사를 쓸데없이 부르짖지 않습니다. 오직 여자를 교육하여 각자의 인격을 완성하여 자기 손으로 해방과 자유를 차지하여 피동적으로 실력도 없이 남자가 준다는 해방과 자유를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여성 스스로 교육을 통해 인격과 실력을 길러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권리 향상과 남녀 동등이 여성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그의 신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그는 강연에서 "우리는 사람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이요,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첫째 알아야 되겠고 배워야 하겠다. 남자의 노리갯감, 남자의 노예 노릇을 하던 케케묵은 시대는 벌써 지난 지 오래이다"라고 역설하며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각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여성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남성에 대한 의뢰심을 버리고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존엄성'을 자각하며 '가정 주부의 중대한 책임'을 다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강력한 자립의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차미리사는 감성적인 호소로 여성들을 교육의 장으로 이끌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개인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사회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더 깊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육은 그에게 있어 개인의 삶을 치유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여성 해방과 남녀 평등을 위한 근본적인 첫걸음이었습니다.

C. 언론과 사회의 반응: 시대는 왜 그녀의 외침에 응답했나?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과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 순회 강연은 당대 언론과 사회로부터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주요 언론은 조선여자교육회 회원들을 "조선여성계의 혁명군"이라고 격려하며, 이들이 학식과 교양을 보급하여 "현모양처의 자격을 구비하고 참정권을 얻는 데까지 운동하여 서양의 여성계와 어깨를 견주게 되기"를 전망하는 등 큰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특히 부인야학강습소에 대해서는 "가정생활을 개선하고 조선사회의 문명을 발달시키며 여성의 해방과 완전한 행복을 도모하는 새싹"이라고 표현하며 그 의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조선여자교육회의 순회 강연을 "시의적절한 강연"이자 "조선 일천만 여성계를 위한 문화선전운동"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러한 언론의 반응은 차미리사가 당시 사회의 필요와 시대 변화를 적절하게 포착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여성 교육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미리사의 강연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교육 중간에 공연을 배치하는 등 대중 친화적인 요소를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강연을 보러 온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대중적 파급력이 컸습니다. 언론과 사회의 압도적인 지지는 차미리사의 교육 이니셔티브가 단순히 개인적인 비전을 넘어, 3.1 운동 이후 여성 계몽과 역량 강화에 대한 사회 전반의 열망을 정확히 충족시켰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던 진보와 변화에 대한 집단적 열망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이를 대변함으로써,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IV. 여성교육사업의 발전과 현실적 타협: 변화의 파고 속에서 어떻게 길을 찾았나?

A. 부인야학강습소에서 근화학원까지: 작은 야학에서 시작된 기적, 어떻게 성장했나?

1. 설립 배경 및 초기 교육 목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첫걸음

차미리사가 1920년 설립한 부인야학강습소는 '여성 교육을 통해 구식 가정부인의 가정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이 시기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목표는 "학비가 없어 학교에 갈 수 없고 나이가 많아 입학할 수 없는 부녀자에게 편지와 신문 한 장이라도 읽을 만한 눈을 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대다수 여성들이 문맹이었던 현실을 고려할 때, 가장 시급하고 기본적인 교육 목표였습니다.

차미리사는 이 사업을 "순전히 한국인의 힘을 모아 여성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절대로 남의 밑에서 월급을 받고 일해서는 안 된다. 또 경제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아래,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한국인 스스로의 힘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확고한 소신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 주야학 병행과 교육 대상의 확장: 희망의 문을 더 넓게 열다

부인야학강습소는 설립 2~3년 만에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학생 수가 급증하여 1년 반 만에 청진동 가옥이 좁아질 정도였으며, 이에 따라 학교, 기숙사, 회관을 확장 건축하기 위한 기금 조성을 계획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성장에 힘입어 1922년 4월, 기존 야학 과정 외에 주간 교육 과정인 '주학'이 신설되었습니다. 주학 과정은 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 준비반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중등 교육 기관 부족으로 인한 입학난을 겪던 여학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1923년에는 강습소의 이름을 '근화학원'으로 짓고 주야학을 병설하여 운영했습니다. 이는 1925년 근화여학교가 각종학교로 인가받아 주학 위주의 교육기관으로 바뀌기 전까지의 과도기적 형태였습니다. 강습소의 주학 개설은 교육 대상의 확대를 의미했습니다. 낮에는 집안일을 하느라 야학에만 나올 수 있는 가정부인들뿐만 아니라, 내외법에 구애받지 않고 주학에 나올 수 있는 여성(부인과 여아)까지 교육 기회가 확대되었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확장은 차미리사가 당시 사회의 변화하는 교육 수요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에 맞춰 교육 기관의 구조와 제공하는 교육 내용을 유연하게 조정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학교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적 관련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B. 근화여학교의 교육 실험과 전환 모색: 변화의 파고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길을 찾았나?

1. 인문계 중등교육 및 전문교육 시도: 더 높은 꿈을 향한 도전

1925년 9월, 근화학원은 보통과와 고등과(중등교육과정)를 갖춘 각종학교인 근화여학교로 총독부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는 야학 과정의 폐지를 의미했지만, 보통과 입학에 연령 제한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부인야학의 정신은 어느 정도 계승되었습니다. 이 시기 차미리사는 여자고등보통학교를 포함한 중등학교 입학난이라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근화여학교 교육에 인문계 중등 교육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근화여학교 인가를 받은 지 불과 3개월 뒤인 1925년 12월에 근화여학교 고등과를 '여고보로 승격'시키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가 이전에 근무했던 배화여학교가 1925년 배화여고보로 승격된 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미리사는 또한 전문 교육 과정의 신설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1924년 3월, 그는 중등 교육을 마친 후 진학하는 전문 교육 과정으로 음악과를 신설했습니다. 이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개설보다 1년 앞서 시행된 음악 전문 교육으로, 중등 교육보다 한 단계 높은 전문 교육 차원에서 개설된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습니다. 그는 3년 과정의 전문부로 음악과와 영어과를 만들고자 했으며, 1930년과 1932년에는 유명 음악 전문가를 교사로 초빙하는 등 음악과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차미리사가 단순히 보통 교육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의 지적·예술적 발전을 위한 고등 교육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탐색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당시의 진보적인 교육 이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근화여학교의 인문계 중등교육과정과 영어반 및 음악반의 추이를 보여주는 표입니다.

<표1 근화여학교 인문계 중등교육과정의 추이>

년도과정출처
1922.4여자주학강습소(여자고등보통학교 1년급 과정으로 내년 입학시험 준비) 신설매일신보 1922.4.13
1922.10오전 오후 두 반, 100명 학생 모집 중여성 1922.10
1923.3여고보 입학 준비반 20여명 재학 중조선일보, 매일신보 1923.3.11
1924.3준비반 졸업생(준비반 마치고 상급학교에 입학할 학생) 10여명매일신보 1924.3.13
1925.3근화학원 주학부 신설, 주학부 준비반 50명 모집 예정 / 야학부 고등보통학교 입학 준비과 50명 모집 예정 / 준비과 내용 확장 / 준비과 50명 모집 중, 만 12세 이상 보통학교 4학년 졸업 정도(당시 정규 보통학교는 6년제였음) / 고등과 2년 과정 예정 (4년제 여자고등보통학교의 속성과정, 6개월마다 졸업식)조선일보 1925.3.3 /3.14, 동아일보 1925.3.20
1925.8.29근화여학교 (각종학교) 인가, 보통과와 고등과 설치.조선일보 1925.8.30
1925.121926년에 고등보통학교로 인가 계획 중조선일보 1925.12.18
1926.2~고등과 1학년 50명 모집 중, 만 12세 이상동아일보 1926.2.11
1927.3제1회 고등과 졸업생 12명. 진로: 중앙유치원사범과4명, 일본 여의전1명, 가정6명 등조선일보 1927.3.5
1928.3제2회 고등과 졸업생 11명조선일보 1928.3.25
1928.9제3회 고등과 졸업생 15명조선일보 1928.9.22
1929.3제4회 고등과 졸업생 6명, 모두 상급학교 진학 예정조선일보 1929.3.17
1929.10제5회 고등과 졸업생 7명, 이화여전 등 상급학교 진학 예정조선일보 1929.10.1
1930.2제6회 고등과 졸업생 9명, 거의 다 상급학교 진학 예정조선일보 1930.2.9
1932.3제9회 중등과 졸업생 28명, 8회까지 중등과 졸업생 80명, 제11회 고등과 졸업생 20명 <신문기사에 따라 졸업회수, 교육과정의 명칭, 졸업생수에 차이가 있다>조선일보 1932.1.27, 매일신보 1932.3.15
1932.7고등과 2학급(1,2학년 또는 4학기 과정) 70명 재학 중, 지금까지 고등과 졸업생 200명신동아 1932.7
1933.3고등과 폐지, 실업과 신설 60여명 모집동아일보 1933.2.25
1934.2고등과 졸업생 18명(진학 8, 가정 7, 취직 3명 예정), 근화여자실업학교 50여명 모집조선일보 1935.2.8

<표2 영어반과 음악반의 추이>

년도영어반음악반출처
1920야학 특별반에서 영어 가르침야학 특별반에서 음악 가르침매일신보 1920.5.13
1922영어반음악반부인 1922.10
1923.3영어과. 야학부 영어반 30명 모집 예정매일신보 1923.3.11, 조선일보 1923.11
1924.3영어과 내용 확장근화학원 음악과 신설, 성악, 기악 가르치고 근화합창단과 오페라단 조직 예정매일신보 1924.3.13
1924.12영어부 확장 예정음악부 확장 예정조선일보 1924.12.21 조선일보 1925.1.1
1925.3전문부로써 영어과 3년 과정 예정, 30명 모집 중전문부로써 음악과 3년 과정 예정. 30명 모집 중조선일보 1925.3.3
1926.35월 특과로써 외국어과(어학과, 외국어강습소) 신설, 영어와 일어의 전문적 교육 / 영어반 1학년 초보, 2학년 여고보 졸업, 일어반 보통학교 6학년 졸업 정도 모집1926.3 특과로써 음악과 1학년 50명 모집 중동아일보 1926.2.11 조선일보 1926.3.23
1926.5한 반에 25명 모이면 개강 예정 / 그 외 독일어, 러시아어, 세계어 예정 / 수업시간 매일 4:30부터 3시간매일신보 1926.4.14
1928.7음악과(2년 과정) 제1회 졸업생 2명(성악, 피아노 전공)매일신보 1928.7.8
1929.2여름방학 이용 음악강습회 개최 예정일보 1930.3.6
1930.3음악과 1학년 50명 모집 중 / 음악과에 성악가 채규엽, 피아니스트 이광준을 교사로 초빙중앙일보 1932.3.24
1932.3무장야 음악학교 피아노 전공한 유수만 초빙조선
1932.7음악과 2학급(2년 과정) 6명 재학 중신동아 1932.7

2. 시대적 요구와 교육 방향의 변화: 미래를 읽는 지혜로운 결단

차미리사의 영어 및 음악 전문 교육 시도는 비록 선구적이었으나, 학생 모집의 어려움과 총독부 인가 문제, 그리고 취업이나 가사에 대한 실용성 부족 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32년 음악과 재학생이 1, 2학년 통틀어 6명에 불과할 정도로 학생들의 호응이 낮았습니다. 이는 당시 일제 지배 하에서 영어보다는 일본어가 더 긴요하고 실용성이 높았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와 같이 학력 인가를 받은 정규 학교의 전문 교육 과정이 학생들의 지원 경향에 더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이러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차미리사는 1929년경부터 근화여학교의 교육 대상과 성격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10년만 지나면 가정부인을 위한 과도기적 성격의 교육기관은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는데, 이는 당시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농촌 계몽 운동, 문자 보급 운동 등의 영향으로 보통 교육이 어느 정도 일반화될 것이라는 예측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당시에도 한국 여성의 대다수가 여전히 문맹 상태였음을 고려하면 이러한 예측은 다소 낙관적일 수 있으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근화여학교를 여자직업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1년 부임한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 '교육 즉 생활, 생활 즉 근로'라는 근로주의 교육을 표방하며 실업 교육을 장려하고, 중등학교 신설 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실업 학교 외에는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차미리사의 이러한 전환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제의 교육 정책이 실업 교육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정규 교육 기관으로 인가받기 위해서는 실업 학교로의 전환이 더욱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차미리사는 "글자나 배워서 무엇 하느냐? 글자가 밥을 주고 책이 집을 주는 것은 아니다. 생활 안정을 위한 실제적 교육이 아니면 조선을 위한 참된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실제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여학생들이 졸업 후 가정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취직난이 극심했던 당대 사회 현실을 고려할 때, 학교 교육이 이론보다는 '실생활과 관련된 것, 취직을 하여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남자의 덧붙이가 되지 말아라", "기생충 노릇을 말며 약자란 소리를 듣지 말아라"고 역설하며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위한 직업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여성이 남녀 평등을 실현하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차미리사가 여성 교육의 이상을 현실의 제약 속에서 실현하기 위해 교육 방향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미래 지향적인 전략적 사고를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총독부의 정책 변화와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을 기회로 삼아, 여성의 실질적인 자립을 위한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입니다.

C.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정착과 덕성여자실업학교로의 개명: 역경을 넘어선 결실, 덕성으로 피어나다

1. 정규 중등직업교육기관으로의 승격: 성공을 향한 굳건한 발걸음

차미리사의 이러한 현실 인식과 여성 교육론의 변화에 따라, 그는 근화여학교를 여자직업학교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1933년, 근화여학교에 실업과를 신설하고 기존의 보통과와 고등과를 폐지했습니다. 이어서 1934년에는 재단법인 설립을 인가받고 학교명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개칭했으며, 1935년에는 3년 과정의 을종 상업학교로 총독부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사업이 시대의 변화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수많은 교육 실험 과정을 거친 결과,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주학의 중등 실업 교육 기관으로 정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1922~1924년 차미리사를 비롯한 조선여자교육회가 보통학교 또는 보통교육과정 졸업자를 대상으로 잠시 시도했던 1년 과정의 상과가 10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형태이자, 취업 전선에 나설 직업 여성 양성을 위한 상과 교육으로의 회귀를 의미했습니다.

언론은 근화여자실업학교에 대해 '직업부인 양성을 위주로 실제교육을 실시하는 시대에 적합'하고 '조선여성들의 새로운 요구에 따라 보통 교육보다도 더 필요한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특히 '조선여성교육의 새로운 단계'라고 큰 의의를 부여하며, 조선여자들의 생활에 가장 필요한 실질적 근본 지식을 넣어주고자 하는 '실생활에 부합되는 교육방침'을 환영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언론의 논조는 연령의 제한 없이 단기간으로 여성보통교육의 확대에 기여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전환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표 3: 실업교육, 직업교육의 진화 : 상업과, 가사과

년도재봉, 수공, 기예 관련상업과 관련출처
1922.1조선여자교육협회 내 재봉부 양복과 신설매일신보 1922.1.30
1922.10수공반 운영 중 수공부 확장 계획부인 1922.10
1922.11상업과 신설, 1년 과정, 20여명 모집, 보통학교 졸업 정도, 오후5:30부터 3시간동아일보 1922.11.7
1923.3재봉반상과생 20여명 재학중매일신보, 조선일보 1923.3.11
1924.3제1회 상업과 졸업식. 상업과 내용 확장.매일신보 1924.3.13
1925.3재봉과 또는 재봉부 신설 (6개월 과정) 모집중동아일보 1925.3.20
1926.1실업교육기관 설치 구상실업교육기관 설치 구상동아일보 1926.1.3
1926.6기예과(편물, 재봉, 자수) 신설, 6개월 과정, 15세 이상 보통학교 2~4학년 정도시대일보 1926.5.28
1929.9기예전문학교로 확장 계획여자직업학교로 전환 구상중외일보 1929.9.21
1931여자실업학교 인가 시도조선일보 1932.1.27
1932.1여자실업학교 인가 위한 재단법인 설립 예정조선일보 1932.1.27
1932.4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 신청, 상과와 가정과 설치 전제로중앙일보 1932.3.20
1933.2실업과를 상업과와 가사과로 나누어 운용 계획조선일보 1933.2.17
1933.3실업과 신설 인가동아일보 1933.3.11
1934.2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 설립 인가조선일보 1934.2.11
1935.2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동아일보 1935.2.22

위의 인용문에서는 근화여학교의 입학생이 줄어들게 됨에 따라, 차미리사가 학교의 성격, 형식, 내용에 변화를 꾀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1932년의 경우를 보더라도 보통과 졸업생 40명, 고등과 졸업생 29명은 적은 수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인원수의 감소로 인해 근화여학교의 보통과·고등과를 폐지하고 실업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언론의 보도는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이는 언론이 학교측과 차미리사의 입장을 대변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전환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각종 학교인 근화여학교로 있으면 비록 학력인정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학기 시작마다 보통과 50명, 고등과 50명, 음악과 30~50명, 합 150명의 입학생 모집(실제 모집되는 인원은 100명 정도)으로 많은 인원을 수용하여 배움의 길을 열어줄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단기 6개월 과정의 재봉이나 사진과와 같은 실업교육까지 합하면 교육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더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여자실업학교가 된 후에는 상업과 중등교육 3년 과정으로 180명만을 수용해야 하기에, 매년 60명의 입학생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곧 각종학교인 근화여학교가 근화여자실업학교라는 정규학교가 되면서 학생 총수(입학생·재학생)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또한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인가는 고등과, 보통과, 음악과의 폐지를 의미했습니다. 이전에 유치원, 초등교육부터 중등, 전문(고등)교육까지 함께 있던 학교의 교육체계가 중등실업교육으로 전환되어 여자중등실업학교로 단일화된 것입니다. 이로써 나이 제한이 없는 여성보통교육기관, 모든 단계의 교육과정 구비라는 근화여학교의 특성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여성인구의 90%가 문맹이었던 한국사회현실에서 학령기를 놓친 기혼부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던 당초의 교육적 역할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근화여자실업학교가 되면서 이전(근화여학교)에 비해 학력의 공인, 중등교육에의 집중, 실업교육의 강화, 정규학교로의 승격이라는 면에서 질적 향상을 이루었지만, 교육대상의 규모와 범위는 양적으로 훨씬 줄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로의 전환은 구식 가정부인들에게 글을 읽게 하고 상식을 깨우쳐 가정생활을 개선함으로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부인야학강습소 시절의 부녀교육론이 여아의 중등직업교육, 직업여성 양성에 중점을 두는 여아교육론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여성교육의 중점이 부인에서 여아로, 비정규교육에서 정규교육으로, 보통교육에서 중등교육으로, 다양한 교육시도에서 실업교육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통한 여권향상이라는 그의 여성교육관, 실업교육관은 유지되었습니다. 생활개선을 위한 여성교육을 여전히 강조하되, 부인의 보통교육보다는 여아의 직업교육, 중등교육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습니다. 차미리사는 신문지상을 통해 여성보통교육이 어느 정도 보급되었다는 판단 하에 정규중등교육과정인 여자실업학교로 전환하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차미리사는 이미 여성교육에 있어 중등실업교육과정과 함께 전문교육과정, 인문계 중등교육과정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또한 1930년대에도 여전히 대다수 한국여성이 문맹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에 사회적으로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을 비롯하여 농촌계몽운동, 한글보급운동, 문맹퇴치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근화여학교의 성격전환에 대한 이상과 같은 차미리사의 설명에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근화여자실업학교 설립은 정규학교 승격을 통한 여성교육의 질적 향상, 여아의 중등직업교육, 가사교육에 중점을 두고자 했던 차미리사의 여성교육관, 실업학교 위주로 신설과 정규학교 인가를 허용했던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 1930년대 세계대공황과 경제난, 취업난을 고려한 차미리사의 현실적 대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차미리사는 부인야학강습소 설립 14년 만에 야학강습소를 정규중등학교로 발전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는 비정규교육기관인 여자야학에서 성장한 여성교육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여 재단법인을 갖춘 정규 중등직업교육기관이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근화여학교는 각종학교(잡종학교)로써 정규교육기간의 반에 해당되는 기간에 속성교육을 실시하는 비정규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는 근화여학교를 정규학교로 만들어 경영해 보고자했던 그의 숙원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규학교에서의 상업교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여성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학교의 위상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1936년 3월 근화여자실업학교 제1회 졸업생 배출에 맞추어 자신의 성과 이름을 김미리사에서 원래의 차미리사로 바꿀 정도로, 근화여자실업학교는 차미리사에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차미리사는 근화여자실업학교의 정규학교 인가에 안주하지 않고 학교의 확장을 목표로 청사진을 제시하며 학교발전을 모색했습니다.

2. 여자실업교육의 지향: 사회진출과 가정주부, 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다

1934년 봄까지만 해도 차미리사는 졸업식 축사를 통해 여성교육을 통한 '사회진출보다 가정'에 중점을 두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세상의 이목을 놀래킬 정치가, 학자, 예술가, 상인이 우리에게서 나와야 겠지요...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니... 실현하지 못할 공중누각을 그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공연히 들뜬 마음으로 사회인 운운을 꿈꾸는 것은 재미없는 일입니다. 여자란 가정으로 들어가 다부지게 일하고 찰찰하게 굴어 그 곳에서 참 기쁨을 찾아야지, 허황된 생각에 들떠 건들거려서는 자기 한 몸이 해를 입을 뿐 아니라 그 해독이 사회 전체에 미칠까 합니다.

이상에서 차미리사는 무엇보다 섣부른 사회진출을 경계하며 가정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실업과를 이수한 졸업생이 아직 배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의 보통과와 고등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훈시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년 뒤인 1936년 3월 근화여자실업학교 제1회 졸업생의 배출과 함께,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은 여성의 사회진출 곧 직업여성이 되는데 더욱 중점을 두게 됩니다. 그리하여 '직업을 가진다는 것'은 남의 종속물, 노예생활, 기생자에서 벗어나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결혼은 해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직업을 가지고 활동하며 자아를 찾은 후에야 참된 아내, 진실한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여자도 인간인 이상 자기도 이 사회의 한 구성분자라는 것을 의식하고,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나 생활이 군색해서 부득이 직업을 가지는 이가 되지 말고, '내 생활은 내 손으로 개척해 나간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사회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성도 알아야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교육을 받고 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자기를 완전히 찾을 수 있다는 당부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남자를 이기라'고 하며 여권의식을 심어주었고, 이를 위해 사회에 나가 취업하고 경제력,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여성교육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은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은 여권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차미리사와 근화여자실업학교가 여성의 상업교육을 표방하고 직업교육에 집중한 결과, 은행, 회사, 금융조합 등 여러 기관에 취직하는 졸업생이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졸업생들의 진로는 취업과 가정이 반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는 근화여자실업학교 여성 교육의 장점으로 직업여성뿐 아니라 가정주부로서의 자질이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사람이 모자라는 우리에게 큰 지식과 이상도 필요하겠지만 진실하고 일 잘하는 가정부인, 살림 살리는 솜씨있는 주부의 손에 바로 잡힐 것입니다. 이 학교는 그저 솜씨있는 일꾼을 길러내는 것이 교풍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건실한 살림살이를 배운 아가씨들은 각각 자기의 직분을 다하기 위해 우리 사회 전반에 흩어집니다.

이와 같은 언론의 논조는 아마도 학교 당국 곧 차미리사의 여성교육론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전환하고자 1932년 4월 총독부에 재단법인 인가 신청을 제출할 때부터 실업과에 상과와 가정과를 함께 두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1933년에는 가사과, 상업과에 각 50명씩 입학생 선발을 계획하는 등 근화여자실업학교에 상과만이 아니라 가사과도 함께 두고자 했습니다. 차미리사가 근화여학교의 정규학교 승격을 위해 학교의 체제와 내용을 정비하면서, 여학교의 가사교육 강화를 원하는 일반사회의 요구와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여권향상이라는 여성계의 당면과제를 함께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는 차미리사의 가사과 설립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과만을 인정하여, 근화여자실업학교를 정규상업학교로 인가했습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는 결국 차미리사의 여성교육관과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의 접합지점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1938년, 근화여자실업학교는 '근화'라는 민족 의식이 깃든 이름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 당국에 타협하여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했습니다. 학교는 취업을 목적으로 상업을 전공하고 주판과 타자 익히기에 힘썼으며, 판매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물건 파는 것을 실습시키는 등 실용 교육에 매진했습니다. 1939년에는 상과 여자 졸업생들의 채용 의뢰가 증가하며 '여성 만능 시대'가 도래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취업 전선에서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비록 여성의 저렴한 인건비가 인기 비결 중 하나라는 한계는 있었으나, 여성이 취직 전선에 활발하게 진출하고 남성 취직 준비자들을 긴장시키는 경쟁자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 후인 1940년, 졸업생들의 취직률은 급격히 하락했고 가정으로 들어가는 이가 취직하는 이보다 2배나 많아졌습니다.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언론의 논조는 1년 전과는 다르게, '가정주부감 교육' '가정이 내 직장'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후 덕성여자실업학교의 교육 목표는 차미리사가 1932년에 구상했던 대로 '실업 교육에 힘써 직업 부인 육성과 현모양처 양성'을 겸한 것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40년 차미리사는 교장에서 물러났습니다. 일제의 강압이 주요인이었지만, 62세라는 나이, 심각한 청력 손상도 은퇴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교장직과 학교는 송금선에게 이양했습니다.

이 시기 차미리사의 여자교육의 중점은 정규 실업교육에 있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자립과 경제활동, 사회활동과 여권향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여자실업교육의 내용은 실제교육 곧 상업·판매 등 직업교육과 기예 양재 등 가사 부업 관련 교육이었습니다. 그가 추진했던 여자교육의 목표는 근화여자실업학교의 확대와 발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지배 하에서 여자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고 확장하면서 일제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었다는 현실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V. 결론

A. 차미리사 교육 활동의 다층적 의의: 그녀의 교육, 시대를 넘어선 울림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 활동은 개인적인 '동병상련적 태도'에서 시작하여, 시대적 요구와 현실적 제약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며 다층적인 의의를 지닙니다. 그는 부인야학강습소에서 출발하여 근화학원, 근화여학교를 거쳐 정규 중등 실업 교육 기관인 근화여자실업학교(덕성여자실업학교)로 발전시키는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보통 교육, 중등 교육, 전문(고등) 교육, 인문계 교육, 실업 교육 등 다양한 교육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1924년에 개설한 음악과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보다 앞선 전문 교육 과정으로, 그의 선구적인 비전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또한 여성 대다수가 문맹인 상황에서도 미래의 교육 수요 변화를 예측하여 보통 교육에서 중등 교육으로 사업의 중점을 이동하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인문계와 실업계 사이의 갈림길에서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실업계로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자립을 위한 직업 교육뿐만 아니라, 가정생활에 필요한 가사 교육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며 실무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을 지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교육 활동은 당대 사회의 기대와 필요에 시의적절하게 부응했으며,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B. 현실주의적 접근과 한계: 현실의 벽 앞에서,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넓은 의미에서 민족 운동 및 여성 해방 운동의 성격을 띠면서도, 그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서는 현실주의적이고 실리적인 타협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는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국권 회복 운동을 중단하고 여성 교육에 집중했으며 , 1921년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 순회 강연은 일제 당국의 허가와 협조, 그리고 관제 언론인 『매일신보』의 적극적인 보도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김활란의 7인 전도대가 강연을 제지당했던 것과 대조적이며, 차미리사가 일제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그는 귀국 이후 민족 문제를 언급하거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민족 의식이 담긴 '근화'라는 교명을 일제가 못마땅하게 여기자 1938년 '덕성'으로 개명하고 , 1940년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나면서도 학교의 확장과 발전을 위한 재력과 능력을 갖춘 송금선을 후계자로 선택하는 등 정치적, 실리적 측면을 고려한 현실적인 조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적 접근 방식에는 한계도 존재했습니다. 차미리사의 여성 교육론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 여성의 법적 지위 문제, 가사 노동과 육아, 가정 경제와 가정 교육 등 사회적 재생산을 담당하는 주부의 역할에 대한 가치 평가 등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으며, 당대 활발했던 농촌 계몽 운동이나 민족 문제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근화여학교의 유지와 발전, 학교 재정 확보라는 당면한 현실 문제에 전념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표 4: 차미리사 교육기관의 진화와 초점

시기/연도기관명유형/상태주요 교육 초점/특징
1920년부인야학강습소야학

기본 문해 교육, 가정생활 개선

1923년근화학원주야학 병설

여고보 입시 준비반 신설, 교육 대상 확대

1925년근화여학교각종학교 (주학 위주)

보통과, 고등과 설치, 인문계 중등교육 강화 시도, 영어/음악 전문 과정 시도

1935년근화여자실업학교정규 을종 상업학교

중등 직업 교육 (상업 교육 중심), 여성의 경제적 독립 강조

1938년덕성여자실업학교정규 을종 상업학교

일제의 압력으로 교명 변경, 실업 교육 지속 

C. 지속적인 유산: 덕성여자대학교, 오늘날, 그녀의 꿈은 어떻게 살아 숨 쉬는가?

차미리사의 교육 활동은 그의 생애를 넘어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세운 근화학원은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의 뿌리가 되었으며 , 덕성여자대학교 교정에는 차미리사 동상과 차미리사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교육 이념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인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는 덕성여자대학교의 창학 이념으로 계승되어 여성 교육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덕성여자대학교는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고 , 1987년 종합대학으로 개편되며 덕성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는 등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차미리사가 꿈꾸었던 여성 고등 교육 기관의 이상은 덕성여자대학교의 발전과 함께 실현되었으며, 2002년에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아 그의 독립운동 및 교육 공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차미리사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교육을 통해 그들이 자립하고 사회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헌신한 진정한 선각자이자 영원한 겨레의 스승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참고문헌:

  • 저자: 김성은

  • 제목: 1920~30년대 차미리사의 현실인식과 여자교육활동: 부인야학강습소에서 덕성여자실업학교까지   

  • 출처: 『중앙사론』 36집   

  • 발행년도: 2012년   

  • 페이지: 99-145쪽    


1. 차미리사의 '동병상련적 태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개인적인 경험은 무엇이었나요?

A. 미국 유학 중 겪은 인종 차별
B. 심각한 청각 장애로 인한 어려움
C.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겪은 고난
D.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경험

힌트 : 19세에 청상과부가 된 경험은 그녀가 다른 여성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교육을 통해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명감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2. 1920년 차미리사가 조선여자교육회의 첫 사업으로 설립한 교육 기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A. 부인야학강습소
B. 조선여자교육회
C. 덕성여자실업학교
D. 근화여학교

힌트: 1920년 설립된 부인야학강습소는 학업의 기회를 놓친 여성들을 위한 야간 학교(야학)로, 차미리사 교육 사업의 시초였습니다.

3. 차미리사는 전국 순회 강연에서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라고 호소하며, 당시 여성들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무엇이었나요?
A. 높은 월급을 받는 직업을 보장하겠다
B. 이혼한 남편을 다시 돌아오게 해주겠다
C. 모든 여성에게 참정권을 얻어주겠다
D. 모든 자녀를 무료로 교육시키겠다

힌트 : 이 약속은 교육을 통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면 가정의 화목을 되찾을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여성들의 절박한 심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했습니다.

4. 1930년대에 차미리사가 교육의 중점을 인문 교육에서 실업 교육으로 전환한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실업학교 위주로 인가해주던 총독부의 교육 정책과 경제난이라는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B. 미국 유학 시절 경험한 실업 교육의 우수성 때문에
C. 학생들이 인문 교육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D. 인문 교육이 여성에게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힌트 : 총독부의 정책 변화를 활용하고,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습니다.

5. 근화여학교 시절, 차미리사는 시대를 앞서가는 교육 실험을 했지만 학생 모집의 어려움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분야는 무엇이었나요?
A. 재봉 및 수공예 기술 교육
B. 가정주부를 위한 한글 교육
C. 전문적인 음악과와 영어과
D. 여자고등보통학교 입시 준비반

힌트 : 이화여전보다 앞서 시도된 전문 음악 교육이었지만, 당시 현실에서 실용성이 낮아 학생들의 호응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6.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에서 여성 해방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은 무엇이었나요?
A. 남성과의 완전한 분리
B. 교육을 통한 경제적 독립과 자립
C. 정치 투쟁을 통한 권리 획득
D. 전통적인 가정의 역할을 완전히 버리는 것

힌트 : 그녀는 "여자의 해방은 여자가 직업을 가지고 자기의 생활을 스스로 지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며 경제적 자립을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7. 1938년, 근화여자실업학교가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가장 주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A. 거액의 기부자 이름을 딴 것
B. 민족 의식을 담은 '근화'라는 이름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 당국과의 타협
C. 다른 학교와 통합하면서 교명을 바꾼 것
D. 차미리사가 '덕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힌트 : '근화(무궁화)'가 민족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압력 속에서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타협이었습니다.

8. 차미리사의 교육 사업이 김활란의 전도단 활동과 비교했을 때, 일제 당국으로부터 비교적 큰 제지를 받지 않고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으로 분석되나요?
A. 강연 내용을 사전에 모두 검열받았기 때문에
B. 기독교 선교사들의 강력한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C. 총독부의 '문화통치' 정책에 부합하는 온건한 교육 운동으로 비춰졌기 때문에
D. 차미리사가 일본어로만 강연했기 때문에

힌트 : 직접적인 독립운동 대신 실력 양성을 강조한 그녀의 활동이 일제의 문화통치 기조와 맞아떨어져 상대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습니다.

9. 근화여학교가 정규 학교인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승격되면서 얻은 질적 향상과 달리, 양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A. 여학생 수는 줄고, 남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B. 전체 학생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C. 학생 수는 변함이 없었지만, 교사의 수가 크게 줄었다.
D. 교육받을 수 있는 학생의 총 수가 오히려 감소했다.

힌트 : 각종학교 시절에는 연령 제한 없이 다양한 과정에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정규 학교가 되면서 매년 선발하는 입학생 수가 제한되어 전체 학생 수는 줄었습니다.

10. 오늘날 덕성여자대학교의 창학 이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은 무엇인가요?
A.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부를 축적하라
B.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C.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라
D. 현모양처가 되어 가정을 빛내라

힌트 : 이 세 문장은 주체적인 삶, 자주적인 사유, 그리고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한 지식 습득을 강조하는 차미리사의 교육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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